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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이맘때쯤 잡설

계획성 없는 부모가 즉흥적으로 이민을 지른 후 자식이 받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나의 모친은 일단 어떠한 것에 꽂히면 일단 일을 저지르고 봐야 하는 성향이었는데 IMF가 터지고 국내 상황이 안 좋아지자 별 다른 리서치 없이 단지 자신의 동생이 해외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이주를 감행한 즉흥적인 케이스라고 봐야 하겠다. 이 때문에 난 아직도 비빌언덕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긍정성을 가지는 사람은 무조건 피하고 본다. 이런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짐만 줄 뿐이라걸 몸소 체험 했기 때문이리라.

그 당시 해외 이주는 도피성이 많은 시절인걸 감안하더라도 준비성의 부제로 우리 가족이 정착할때 우리 수중에 있었던 정보의 양은 마치 난민 가정이 다급히 해외로 피난을 올때의 수준이었다. 가족 3명중 어느 누구도 언어의 구사 능력이 없었고 늘 어린 나에게 자신의 학습력을 과시하던 나의 모친께서는 정작 이런 상황에서 언어 습득을 하려는 의지는 1도 보여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였던가, 절실함 때문에 남들은 1년 꽉 채우는 랭귀지 스쿨을 7개월 만에 끝내고 일반 학교에 진학했다.

정확히 이 시점부터, 부모와 나의 역할이 완전히 뒤 바뀌었다. 단순한 부모의 입을 대신하는것이 아니라 난 만 13살 나이에 그들의 가디언이 된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이모와 사이가 틀어져 이사를 나온 후로 부터 부동산 계약서 확인, 이민 관련 서류 확인, 돈거래 시 영문으로 차용증 발급, 자동차 등록, 비지니스 관련 소통까지 다 내 몫이 되어 버렸다. 어찌 보면 부모의 생계는 나의 언어실력이 아니면 유지가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 나에게 더더욱 의존 하게 되었다. 뭔놈의 사는집에 대한 불만은 그렇게 많았는지, 이웃이 맘에 안 든다, 통풍이 안 된다, 거리가 멀다 별별 이유를 다 들며 한국에 살던 시절보다 이사도 많이 하게 되고 이럴때 마다 주소 변경이니 전화국, 전기 회사에 연락하는건 내 담당이 되어 버리니 전공을 그쪽으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는 공간에 대한 애착이 1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부모는 나에게 자기네들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심리적 위축을 엄청나게 해댔는데 이 시기 학교에서 당한 은따와 함께 융합 되어 거의 폭발 직전의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사람에겐 천성이란게 있다고 믿는 사람인데 내 본래 성격자체가 겁이 많고 남을 해칠시 내가 나중에 감당해야 할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 부모에 대한 원망이 나에 대한 파괴로 이어졌다. 흔히들 강압적인 부모에게 딸들이 유년시절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 거식증이라고 하더라.

나 또한 미성년인 신분으로 어떠한 것도 내 손으로 변화 시킬 수 없는 갑갑함 때문이었는지 내 체중과 식욕만은 내가 유일하게 통제 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이 집착이 거식증으로 변하는데 몇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심할때는 하루에 사과 한알도 손을 덜덜 떨면서 안 먹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 그 와중에 밥상에 앉아 음식을 한번 권하다가 뿌리치는 내 앞에서 음식을 우걱우걱 먹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저것들은 정말 사람의 탈을 쓴 짐승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두번 느낀게 아니다. 내 부모는 이민에 대한 준비만 부족했던게 아니라 양육에 대한 준비도 부족했는데 욕조에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떨어져 있는것을 보고도, 매일 기력이 없어 등교 시간 맞춰 못 일어나는걸 보고도, 방에 앉아 거울을 보며 울부짖는 나의 소리를 몇번을 듣고서도 거식증의 심각성을 몰랐다.

내방에서 거실로 몇발자국 가는데 숨이 차오르고 잠을 자고 싶은데도 심장이 쿵쿵거려 잠을 못자는 날이 연속으로 이어지자 문득 내 머릿속에 ‘ 이러다간 정말 그 다음날 내가 시체로 발견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고 그것 때문이었는지 그 담날 부터 내 스스로 음식을 챙겨먹기 시작했다. 거진 2년을 그렇게 살았으니 생리불균형이 올 수 밖에 없었고 모친은 그제서야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건 정말 미스테리이다. 어린애가 2년째 생리를 안하니까 자기 딴엔 온전한 사람 구실을 못할까 두려움에 그랬나.

같은 시기 나는 부모만 믿고 가다간 내 목숨 부지가 힘들겠다는 생각도 함께 했었나보다. 그래서 15살에 알바를 시작했다. 내 부모는 물론 주위 어른들은 그 나이에 기특하게도 자기 용돈을 벌 생각을 하는 성숙한 어린 아이 취급을 했는데 분명히 하자면 아주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살아 남기 위해 경제 생활 연습을 시작한거라 할 수 있겠다. 이 시절에 난 일부러 쉽게 쉽게 갈 일도 더 어렵게 만들어서 나를 괴롭히곤 했는데, 이렇게 단련 시켜야 내가 나중에 홀로 서더라도 어떤일에 맞딱드리더라도 수월하게 해결하는 노하우가 생길꺼 같은 믿음에 그랬던거 같다.

그리고 인터넷에 사람들이 적는 글들을 유심히도 찾아 봤다. 세상엔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아주 열심히 찾아 봤다. 이것 또한 부모가 몸소 내게 ‘인간은 믿어서는 안 되는 짐승’ 이란 메세지를 직접 심어주시니 어떻게 하면 나를 그런 짐승들에게서 방어 할까 그 생각만 했던거 같다. 다음 아고라 부터 카페며 커뮤니티 생활에 집착한것도 그런 맥락이다. 아주 외부인과 아무런 교류가 없는 폐쇄적인 동양인 가정에 하나 뿐인 딸로써는 세상에 대한 이해가 이런 간접적인 경험을 통하지 않고선 불가능 하기 때문에 사태 파악을 위한 일종의 동향 분석이었다고 할까.

타자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인생이 좌지우지 되고 여러번 엎어져 버리는 경험을 통해서 난 입증되지 않은, 미지의 어떤것에 대한 기대나 믿음을 미리 차단해 버리는 버릇이 생겼다. 흔히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은 나를 시니컬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꼬인 사람으로 보는데, 그건 엄청난 오판이라고 정정해주고 싶다. 당신이 동전의 뒷면을 보지 못 한다고 해서 아예 없게 되는게 아닌것 처럼. 당신의 선택이 당신에게 마련해 줄 수 있는 잠재성을 보고 뜬 구름을 잡을때, 난 그 선택의 현실적 가능성을 본다. 상담 받을때 나를 어떤 성향의 사람으로 생각하냐는 질문에 난 아무런 의심없이 ‘아주 방어적인 사람’으로 생각한다 답했다. 사주에 사람이 잘 붙는다는 점쟁이 얘기 한 마디에 모든걸 다 끼워 맞추고 전 재산 털어서 장사에 도전하려는 모친을 두었다면 아주 당연한거 아닌가 싶다. 다시금 생각해봐도 부모에겐 내가 비빌 언덕이었으나 나에게 비빌 언덕은 세상에 아예 없었다. 부모가 미끄러져도 나에겐 인생 종말이고, 내가 미끄러져도 나에겐 내 인생 종치는 날이었으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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