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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ormance Anxiety

예술인들은 무대 공포증 또는 무대 강박증이 있다는데

직업 특수성도 없는 나 또한 제출해야 하는 모든것에 대한 강박 또는 공포가 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무언가를 쉽게 하지 못하고 할 일을 병적으로 미루다가 크나큰 실패를 경험하는 문제는 학생들 그리고 사회초년생에겐 어느 전염병보다 더 두려운 질병같다.


나 또한 어릴적엔 그저 방학 숙제로 일기 쓰는걸 밀리고 빨간펜 학습지를 밀려 선생님 오시기 전 30분전에 막판 스퍼트를 내는 그런 전형적인 벼락치기 선수였다. 중고등 학교때도 그렇게 벼락치기를 고수했는데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적정한 능률과 페이스는 유지를 했기 때문이다.


며칠전 어쩌다가 보게 된 한국의 교육열 문제를 다룬 알자지라 다큐에서 학생들이 한입을 모아서 하는 말들이 "한국에선 실수가 용납이 안 되는 분위기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벗어난 나 조차도 어려서 그릇된 사고관 주입으로 평생을 나 자신을 학대하면서 살아 왔는데 정말 저런 분위기 안에서 사람들이 숨쉬고 살아가는게 크나큰 기적이다 싶기도 하더라.

내 주관으론 이런건 당연히 용인 되어서는 안 되는 문화의 일부분이고 이걸 성공의 밑천이라고 목에 핏대 세우며 티비 강연이다 뭐다 펩토크 하는 사람들도 돈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쉽게 엿바꿔 먹을 수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스톡홀롬 신드롬에 가깝달까.


아무튼 간에 어릴적 나 또한 실수에 대한 크나 큰 두려움이 있었다. 이 공포는 당연히 엄마의 엄포에서 기인한다. 나르시시스트 부모 밑에선 아이는 어떠한 일을 하던간에 비난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엄마의 기분상태가 아예 다운되었다던지 아니면 분노를 표출을 해서라도 상황을 전환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시 (아빠에게 직접 성질을 내면 싸움으로 번지니 중간에 있는 아이가 박이 터지는 상황)는 그냥 백퍼센트 비난의 화살이 아이인 나에게 쏟아졌는데 어린 나의 입장에선 내가 뭘 했길래 저럴까라는 질문이 드는것도 잠시, 그게 쌓이고 쌓여 '그냥 에라 모르겠다 다 내 탓이라고 하고 넘어가자, 그냥 닥치고 잠자코 있자' 라는 생각이 굳건히 자리잡게 되었다.


엄마는 당연히 자기가 왜 화가 났는지 논리적으로 나에게 설명할 수 없다. 미성년인 아이가 본인을 화나게 해봤자 가게에 온 손님이 연달아 외상을 달아 놓고 다른 동네로 런을 하는것과 어떻게 비할데가 있겠으며 남편이 옆 동네 캬바레에서 다른 외간 여자랑 놀고 있다라는 소식을 듣는거랑 어떻게 비비겠나. 당연히 내가 본인 분노에 전적으로 기여한게 없거든.


이런 일을 했더니 --> 엄마가 화를 내면서 앞으로 하지 말라더라 = 앞으로 하지 말아야지 하는 공식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매사에 분노하는 엄마를 만나게 되면 기본 에티켓, 삶에 대한 자세 같은게 정상적으로 학습이 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입 조심, 행동 조심을 하게 되는데 이게 꼬꼬마때 부터 학습이 되면 생각의 통제로도 연결이 된다.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거 조차도 비난을 받을까봐 조마조마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공포를 어떻게든 해소 하기 위해 나는 두 가지 방어기제를 만들어 냈다. 하나는 완벽주의 그리고 두 번째는 미루다가 막판에 벼락치기.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건 엄청나게 모순 된거지만 내 학창시절은 이 두 가지 행동패턴이 항상 공존했다.


이게 병적으로 문제를 만들게 된건 대학교를 들어가서 부터다. 만성적인 불안이 나의 정신력을 본격적으로 갉아먹게 된건 과제가 많기로 유명한 건축 디자인을 지망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천성이 긍정적이었다면 대강 하고도 남았겠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틀리면 안 된다는 완벽 주의, 남이 퍼붓는 비난을 인간적 실패로 연결짓는 사고방식 이 두가지 만으로도 과제를 미루는 낙천적인 습관 보단 아예 다 손놓고 도망가고 싶단 생각으로 이어졌다.


내가 어려서 부터 처한 상황만 봐도 사람 멘탈이 자동적으로 유리 멘탈이 되는 상황인데 그것도 정답이 없기로 유명한, 강사의 비판이 학점으로 연결되는 지극히 주관적, 막말로는 편협한 디자인 학과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학과 선택이 나를 직접적으로 나락으로 떨어트린건 아니지만 어차피 나락으로 떨어질꺼 속도를 더 쎄게 붙였다라고 보는게 맞겠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과제인데다가 뭐 확실한 정답이 있는것도 아니라서 그냥 성질로 밀고 나가면 그럭저럭 괜찮을 평가를 받을텐데 우길만한 베짱도 없는데다가 강사한테 뭔 소리만 들으면 이걸로 그냥 세상 끝났다는 두려움이 몰려오니 이렇게 바꾸고 저렇게 바꾸다가 시간만 버리길 몇 주. 이게 몇년간 계속 되풀이 되면서 대학 입학 이전 부터 있던 불안의 크기가 눈덩이처럼 불어 났다.


불안으로 인해서 정신이 무너지는 과정은 일단 공황장애 같이 일상 생활에 확실히 걸림돌이 되는 증상들로 시작됐다. 어릴적엔 그저 강박적 습관 (완벽주의)나 식이장애로 불안이 발현 되었기 때문에 삶의 질은 현저히 떨어졌지만 생활을 이어나가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공황장애라는 단어를 알기도 전이었는데 학교 과제 제출일이라던지 과제 발표날에는 학교 문턱까지 갔다가 호흡곤란과 눈앞이 노래져서 실신하는 줄 알고 뛰쳐 나온적이 몇번 있다.


이게 지속이 되다 보니 학교 생활이 위태로와 졌고 결국엔 출결일 부족과 과제 제출을 못해 F를 받기를 여러번 그래서 제적 직전까지도 갔고 꾸역꾸역 뒤늦게 과제를 내는등 그렇게 무마를 하면서 한 5년을 버텼다. 뭐 이러다 보니 학교를 다니면서 같은 학번의 개념이 있을리도 없고 동급생과 소통도 없고 학교에도 과제 내는 날에만 출몰하는 그런 유령이 되었다. 그렇게 서서히 사회와 단절이 되고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 5년간의 시간동안은 불안이 중증 우울증으로 변하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중증 우울증에 대해서는 내가 깊게 적었던 글이 있었기에 생략을 하겠고 이 시기 내 사고 방식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기울었었기에 설령 나에게 사회 참여 기회가 있었다쳐도 나가 떨어졌을꺼라고 생각한다. 피해 의식이 지나쳤고 정의, 윤리에 대한 병적인 집착 때문에 방구석여포질을 식음을 전폐하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도 내 삶에 있어서 부조리함이 지나치단 생각이 (패배주의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그때는 그게 내 현실이었기 때문에) 뉴스의 사회면에 그대로 투영된게 아닌가 싶다.


그러기도 할것이 엄마는 내 불온전한 정신상태를 장관탄원에 이용할 정도였기 때문에 내 아픔 조차도 내가 아닌 사람의 이득을 취하는데 이용된다는 상황이 억울했다. 호주 밖에서 신청해야 하는 비자를 호주에서 신청을 하려니 그 비자 신청서가 기각이 되었고 한국에는 죽어도 가기 싫으니 '딸이 아파서 간병을 해야 한다'라는 이유로 장관에게 탄원서를 낸것이다. 결과는 당연히 안 좋았다. 그래서 나중엔 두 사람의 국외 추방으로 이어졌고 이 상황은 안그래도 중증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나에게 한가지 트라우마를 더 안겨 주게 되었다. 어찌보면 정의와 윤리, 도덕을 넷상에서 부르짖던 이유가 이런 현실에서 기안한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 수년간 지속이 되다보니 내 몸은 이런걸 영구적으로 기억하게 되었고 직장에서 제출 기한이 떨어지면 대학때 일어난 센세이션이 재생되고 잘 못하면 -> 인생은 끝이 나고 나는 거리에 나앉게 될것이다라는 생각의 전개로 항상 귀결 되었다.


아무래도 데드라인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이성적인 사고 회로보단 과거에 축척되었던 감정과 몸의 감각에 압도되는게 반복이 되기 때문에 이 혼란에서 빠져나오는게 참 힘들다. 심할때는 이런 상태가 몇일이 지속이 되는데 일종의 공황발작 같은게 장시간 옅은 농도로 지속되는거로 그냥 여긴다. 이런 몸상태가 복합 PTSD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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