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속 나에 대한 진심 어린 애도 (grieving)가 필요하다.
- Ramblings K
- Feb 1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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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간 나를 30년간 괴롭힌 불안에 대해서 집요하게 극복하고 치유를 하려 노력을 했었건만 그 중 너무나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게 있다. 과거에 내 자신에 대한 진심어린 참회와 애도.
정말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주변에 지인이 처해있는 상황이 너무나 나의 과거와 일치해서 그걸 보며 답답해 하던 중
‘저 사람은 자신의 혈육에게 일생을 양보에 양보만 해주다 결국 배신을 당하고 나머지 가족 마저도 이번에도 저 사람이 한번 더 져 줘서, 상대방을 용서해주고 화목한 가정인척 다시 되돌아가길 바라는 이기심을 어느 여과 없이 드러내는 그런 환경에 처했는데.
누가 저 사람을 위해 울어 줄까?
난 속으로 저 사람을 보며 울고 있는데 본인 앞에선 차마 못 울겠어. 그러면 안 될꺼 같거든. 나도 못 울어 줄 상황이라면 저 사람 본인이라도 자기를 위해서 한번이라도 자기가 불쌍하고 가엾어서 울어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적이 있다.
그러면서 거기서 나를 봤다.
지난 3년간 나는 내 불안의 씨앗을 심어준 엄마에 대한 분노 원망에 대한 울음,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회한 섞인 눈물, 지독하게 나에겐 가혹했던 지난날 세상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 나는 어떤 선택권도 쥐지 못한채 태어나 아무한 방패막도 없이 운명의 휘둘림에 당했다는 억울함이 섞인 눈물들..
이런것들은 하염없이 흘리고 흘렸지만 정작 어릴적 불안 속에 갇혀서 하루를 지옥같이 살아야 했던 나에 대한 어떠한 미안함 같은건 느끼지 못했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제 3자에겐 느끼는 그 연민 섞인 애도, 슬픔을 정작 나 자신을 상대로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느꼈지. 이렇게 자기 혐오란것이 그렇게 무섭고 내 눈을 멀게 만드는데도 내 내면속 아주 어둡고 깊숙한 곳에 있어 제일 마지막에 발견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나 짚어 보면 이렇다.
심리치료를 시작하면서 선생님한테 자주 들었던 단어가 “내면화 된 엄마의 목소리”였다.
내 엄마는 악성 나르시시스트였고 혈육에 대한 감정도 결여된데다가 혈육을 상대로도 편집적인 망상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가족을 자신의 돈을 노린 도둑으로 몰고, 자신을 당장이라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고 매일 경계하는 그런거 말이다. 그런것 때문인지 상대방의 본모습(?)이 드러나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선수를 쳐서 가족을 도둑으로 만들고 자신을 질투해서 자신의 모든것을 앗아가려는 파렴치한으로 몰았다.
말로 들으면 마치 얼굴이 빨갛고 이마에 뿔이 달려 있을것 같다. 허나 나르시시스트들은 너무나 일반인들처럼 우리 곁에 산다. 인구속 분포로 본다면 그냥 일반인의 전형이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다. 나는 마치 소수민족 취급한다. 솔직히 그들을 마주치는 빈도는 더 높다.
난 이런 사람의 딸로 태어났다. 그래서 어릴적 부터 자식에 대한 감정의 동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사람에게 컸기에 그만큼 보편적인 엄마는 전혀 하지 않는 그런 날선 비판, 비현실적인 목표 지향, 진심이 담기지 않은 (부수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격려 같은것에 무방비 상태로 수없이 노출 되었다. 어리고 부모가 알려주는걸 받아먹을 수 밖에 없는 나는 엄마가 주는 협소한 음식 이외에도 이런 엄마의 리액션도 다 주워 모아다가 내 머릿속에 이렇게 살아야만 엄마가 말하는 ‘온전한 인간’의 형태를 갖출 수 있겠구나 하며 마치 진리의 말씀, 성경처럼 머리에 주입시켰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한다. 이걸 내면화 된 엄마/부모의 목소리라고 한다.
아이는 부모가 알려주는 삶의 지혜를 아무런 의구심 없이 받아 들인다. 그 부모가 정말 지혜롭고 자식을 사랑으로 보듬어 주며 그들 또한 인내심이 강하다면 너무나 금상첨화다. 아이는 “내면화 된 부모의 목소리”가 나의 어떤것도 인내해주는 그런 자상한 목소리가 된다. 나 또한 이렇게 될 수 있었지만 내가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어떠한 선택권도 쥐지 못하고 태어났기에 내 내면의 목소리는 “모든 면에서 이상적인 사람이 당!장!이라도 되어야 하는 (엄마의 비현실적이게 높은 이상과 본인의 주체할 수 없는 조급함) 만약에 안 그럴경우 그 실패는 몇천개의 비난의 화살로 나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그런 위력의 것이었다.
당연히 엄마가 나를 24시간 따라다니면서 나를 매시간 나를 붙잡고 그렇게 나를 괴롭힌건 아니다. 본래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다. 아이는 안중에도 없었고 그냥 본인의 의중만 모두에게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허나 가끔, 엄마에게 내가 무엇인가 요구를 할때면 엄마는 그 귀찮음이 무의식적으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그 얼굴을 들이밀게 만들었고 그랬기에 정말 가뭄에 콩 날만큼 애한테 하는 리액션에 날이 선 비판, 분노, 조급함,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요구 이런것들이 섞여 있었을 뿐. 어린 나는 그것이라도 주워 담아 머리에 넣었다. 받은게 그것뿐이고 뇌리에 그것밖에 남는게 더 있으랴? 이게 10년 20년 30년동안 단단히 압축되면 내 모든 행동에 제약을 걸게 된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자기 혐오의 원인이다. 어려서 부터 주워듣고 내 머리에서 멈추지 않고 반복재생하는 엄마의 목소리. 아빠의 목소리 일수도 있고 보호자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현실의 엄마와는 몇천배 강력한 강도로 끊임 없이 나를 몰아 세우고, 불가능한것들을 요구하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희생해서 ‘완전한 인간’이 되라는 이런 어불성설 같은 말을 나는 매일 내 머릿속에 무의식적으로 틀고 있었던거다.
심리학 책에 인용된 연날리는 소년(?)(영어 원제로는 The Kite Runner라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문장이 있는데 “나이가 차고 어른이 된 나는 그 과거속에서 벗어 났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일초도 빼놓지 않고 그 과거 속을 지난 26년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내 지난 날을 다 함축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서 엄마한테 주워들은 모든 말들은 내 삶의 영역 곳곳에서 나를 벼랑끝으로 몰아세우고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며 마냥 이것이 나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꺼란 자기 암시에 빠져 살게 했던것이다.
이건 결국 나의 탓이었다라고 말하는것이 아니다. 불가항력적인것이다. 나 자신이나 여느 유복하게 정서적인 발란스를 갖추고 자란 아이나 너무나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대한 정보를 흡수하고 이런면에선 나 자신이나 다른 아이이나 다 다를게 없는것이다. 어린 나는 그 또래 인간이라면 다 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배우려 한거였지만 그 표본을 제공해주는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던것이다. 이런면에선 똑같은, 혹은 더 잔인한 유년시절을 지냈던 엄마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나 자신이나, 엄마나 본인의 정서적 상태가 이렇게 흘러간데에는 본인에겐 어떠한 책임도 잘못도 없다.
허나 나와 엄마랑 다른점은. 나는 끈질기게 정말 내면화 된 이 엄마의 목소리가 정말 맞는 말을 해대는것인지 계속 의구심을 가졌다는것에 있다. 왜냐하면 내 내면속의 말을 들었던 까닭에 나는 거식증에 걸렸었고 우울증으로 인해 학업에 매진하는데 문제가 있었고 대인기피에 친구를 왜 진심으로 못 사귀는지 내 자신이 답답했고 결론적으로 노력을 하면 할 수록 내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걸 체험 했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남친과 말 싸움을 하다가 내가 크게 분노해서 울면서 나 자신에 대한 항변을 하다가 그때 깨달았다. 나는 어려서 부터 엄마와 몇개월에 한번 나갈까 말까한 가족이나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선 나에게 꾸지람을 주며 조신하게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음식을 복이 없게 먹는다 어른에게 말을 본떼 없이 한다 이런말을 들은적이 간혹은 있었어도 나는 10살 이후로는 줄곧 나 혼자 다니길 즐겨 했는데 왜 나는 나 자신에게 왜 매시간 시간 마다 매일 같이 내 행동 거지를 단정히 해야 한다라는 경고를 줬을까.
그 다음날 내가 여지껏 내가 내 자신에게 뭔짓을 하고 있었는지 미안해 미칠것만 같은 느낌에 울음이 저절로 나왔다. 현실속의 내 엄마 보다 내가 만든 엄마의 환영/망령이 더 나를 잔혹하게 대하고 있었구나. 너는 그 살기 서린 미친 목소리를 도대체 몇년을 듣고 살았던거야. 그러면서도 힘든 내색 한번 못 내보고 그렇게 살았구나.
내가 나에 대한 진심어린 애도를 한거다. 엄마가 나에게 줬던 찰나의 혐오들의 조각들을 모아서 거대한 자기혐오란 피라미드를 쌓아 놓고 그것이 마냥 내 삶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던거구나.
글이 솔직히 너무 길어지니 쓰는 내가 부담 스럽다. 이 내면화 된 엄마의 목소리가 내 삶을 어떤 식으로 지배했는지는 따로 써야 할거 같다. 자기애 문제를 가진 여성들이 내글을 읽고 적지 않은 위로를 얻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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