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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과 반항

살면서 제일 감명 깊었던 유명인의 인터뷰를 꼽자면 가디언지에 실린 슬라보예 지젝의 “우린 모두 악하고 이기적이며 혐오스러운 존재”를 꼽겠는데 뭐 성악설 같은 심오한 컨셉 때문이 아니고 지젝이 자기 또한 실패한 아버지라는걸 인정하는 부분 때문이었다. 이 한 문단 때문에 이 인터뷰가 나에겐 천금과도 같은 가치로 빛이 나더라.

이 부분에서 지젝은 하루는 14살인 아들과 말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분노가 폭발한 나머지 아들에게 모국어인 슬로베니아어의 욕을 내 뱉었는데 그 내용인 즉슨, “야, 니 엄마보고 가서 개랑 ㅆ이나 하라고 그래.” 라는 쌍욕을 던지자 아들이 “이미 15년전에 울 엄마가 했던거 잖아요.”라고 되받아침에 본인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었다는걸 이야기 한다.

왜 이렇게 더럽고 난잡한 부자간의 쌍욕배틀이 보석같이 빛나게 보였을까?

14살짜리 아들이 감히 자기 아빠를 대면하고 말을 받아치는것도 모자라서 자신이 개만도 못한 아빠와 엄마가 ㅆ을 하는 바람에 태어난 자식인걸 서슴없이 말한다는 용기가 빛나 보인다는 것이다.

저 아이는 비로소 더럽고 추잡스런 욕을 내 뱉는 분노조절 못하는 아빠와 치명적인 실수(?)로 그런 남자와 결혼 해서 아이까지 낳은 엄마와는 분리된 독립된 개체로써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저 혐오스러운 아빠와 그런 남자와 사랑에 빠진 치명적인 실수를 한 엄마의 유전적인 인자를 물려받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앞서고 나중에 나도 저렇게 되는건 아닐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는데도 말이다. 저런 가장한테 성인이 될때까지 내 삶을 맡겨야 하나 하는 두려움이 앞서는데도 말이다. 심지어는 어릴적 아빠가 보여준 다정다감한 모습도 뇌리에 휙휙 스쳐지나가고 말이다.

부모에 대한 두려움, 의무감, 죄책감 이 세가지를 다 넘어설 준비가 되었다는 얘기다. 저 추잡한 한 마디가 말이다.

사춘기는 반항과 일탈의 시기이다. 허나 이 시기는 내가 어려서 부터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보호자에 의해 그리고 문화에 의해 주입된 가치관이 정말 절대적인 가치인지 의문하고 타인을 통해 의문없이 받아 들이는것이 정말 나에게 이득이 되는것인지 확인하는 시기이다. 이때는 본능적인 욕구와 사회가 제단한 가치관이 충돌하는 시기이다. 욕구 충족이 사회적 가치관을 앞서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도 본인이 쌩으로 깨지면서 절실히 느끼는때이다.쉬운말로 “그때 그때 달라요”를 배우는 시기인데. 상황에 따라 욕구와 윤리적(또는 다른 분야) 가치관이 어떤 비율로 상충하는지 그것도 파악을 하고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다듬는 시기이다.

이래서 일탈이 일탈로 끝난다는 말에 나는 심하게 반기를 드는데. 사춘기의 일탈이 있으므로써 왜 무식하게 사회의 룰만 따르면 내가 다치는지 아니면 내 욕구를 좀 억누르고 사회의 룰을 따르면 나에게 어떤것이 주어지는지 결국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래서 아이들은 때로는 어른이 보기에 괘씸한 생각도 해봐야 하고 자기만의 세상 살이 셈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걸 억누르게 되고 어른에 대한 도발적인 생각을 멈추게 된다면 일평생을 가치관을 별 문제 없이 주입 받는것에만 익숙해지고 자신의 육체 정신이 다치는 줄은 모르고 계속 들은대로만 노력을 다 하는 그런 굴레에 갇히고 만다고 생각한다.

이점에서 지젝의 아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추악하고 적나라하지만 시기에 너무 걸맞고 잘 구현 되었기에 보석처럼 빛나게 보일 수 밖에 없었던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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