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을 편지
- Ramblings K
- Jul 5, 2019
- 10 min read
Updated: Nov 24, 2020
오랜세월 친척인데도 불구하고 이모와 말을 이렇게 섞어 본것도 제 평생 처음인거 같네요. 어찌보면 20년동안 제가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서야 또박또박 말 할 수 있게 되어 어느새 이렇게 부쩍 커버린 제 내면의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하더군요.
얽히고 섥힌게 사람 인연이고 지금 같이 가족간의 대립이 마치 흙탕물 싸움처럼 번져지는 때라 할지언정 일련의 통찰이 있다면 인과관계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통해 그걸 전하고자 합니다. 당신이 이 글을 볼 일은 없을테고 만약 읽더라도 극도의 혼란만 야기할것을 알기 때문에 굳이 전달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냥 마냥 사시던대로 사시면 됩니다.
삶의 불운을 헤쳐나가고 살아 남는것이 동물로써의 인간에게 가진 생존 본능이라면, 이런 불운속에서 고통을 겪고 내면에 성장을 위해 ‘나에게 무슨 변화가 필요한가’ 라고 되묻는것은 이성과 감성을 지닌 인간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지요.
허나 당신의 가족, 즉 제 외가에 퍼진 저주란 삶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그 사고방식이고 이는 아마도 여러분의 생이 다 할때까지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마치 가족력에 의한 장애라고 칭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평생 둘러싸여 저는 어린나이부터 아주 수없이도 내 가족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악행, 불행에 대한 원인이 마치 내 자신에게 있는 줄 알고 한평생을 책망해왔죠. 남들 탓만 하는 당신같은 무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삶의 비극에서 당신들을 꺼내 줄 구원자이거든요. 그래서 일평생 저는 그런 전지전능한 완벽함에 충견의 충실함을 가진 당신들의 구원자이자 하인이 되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했는지 모릅니다.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 가난과 소외라는 내 가족이 처한 비극의 사슬을 내 힘으로 끊어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에 그것을 제 사명과 소망으로 삼고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 하면서 완벽한 구원자가 되리라 제 스스로를 단련시켰습니다. 당신들이 나에게서 바라던것, 내 자신이 나에게서 요구했던 이 완벽함과 댓가 없는 헌신이 인간에게 요구해서는 안 될 부조리한 것이라는것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죠. 애초에 요구자체가 비현실적이고 부조리 했기에 저는 수없이 넘어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면서도 수없이 나에게서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고요.
과거의 당신들이 당신들의 무지로 인해 만들어낸 불행의 조각들을 훗날 아무런 연관이 없는 후손인 내가 당신과 피를 나눈다는 이유 만으로 다 치워줘야 할 의무가 있을까요? 설령 내가 발벗고 나서서 당신들의 뒷처리를 해줄지언정 그건 의무나 책임감에 의한것이 아니라 당신이란 사람이 안쓰럽고 불쌍하기 때문에 연민과 동정심에서 우러나오는 호의가 아니겠습니까? 쉽게 말해 내 맘이 내키면 해줘도 그만 안 해줘도 그만이라는 얘기입니다.
어려서 부터 제 눈엔 이미 내 부모며 당신 내외까지도 마치 희극 꽁트에 나오는 슬랩스틱 연기자들 같았습니다. 당신들이 고개를 치켜들며 별스럽지도 않은 무용담을 꺼내며 이 정도면 호주 상위 1퍼센트에 드는 재력을 가지지 않았느냐며 으시댈때면 저는 제 입을 굳게 닫아 버리고 건조한 추임새 따위만 던졌습니다. 이미 그 나이에도 이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내 말과 생각을 진중하게 들어주거나 이해를 할 사람은 없다는걸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표현을 써도 당신 무리는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언어를 쓸 줄을 몰라 나와 교감을 할 수 없어요.
이 글에서 적어도 당신께 질문할것이 넘치고 넘치겠지만 이건 정말 묻고 싶습니다.
상대방의 감정에 한번이라도 귀기울여 본적이 있나요?
자신의 감정도 잘 몰라서 평생을 혼란과 홧병에 헤메이던 당신에게 남의 심정을 이해는 해봤쟈고 물어 보는것이 마치 초등학생에게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도를 묻는것과 마찬가지 이겠군요. 내 사고를 바꾸고, 내 습관을 바꾸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을 통채로 바꾸는것은 죽을만큼의 내면적 고통이 따르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것입니다.
그러기에 더 나은 나 자신을 위해 변화 하려면 큰 고통이 따르기에 그것이 두려운 나머지 내 자신이 불편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단점이 있더라도 남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 그들에게 마치 당신의 문제가 태초부터 그들의 책임이었던것 처럼 날선말로 그들에게 가족이 된 도리며 원죄니 무엇이니 있어서도 안 될 죄책감을 유발하는것이죠. 당신 자신은 당신의 문제에 나몰라라 하며 손가닥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당신의 소위 해결사들에겐 왜 더 노력하지 않느냐 핀잔만 주게 되는겁니다. 당신은 그 해결사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기생하는 상태에서도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해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보이기는 커녕 닥달과 불만을 퍼붓고 그걸 연료 삼아 일을 더 빨리 진행 시키려는 이기적인 욕망만 뿜어내는 거죠.
더럽고 험하기만 하던 한국을 벗어나 호주에서 새 삶을 찾았다고 해서 당신의 속알맹이가 달라졌겠습니까. 껍데기만 바꾼거죠. 삶의 여유와 평안을 찾은 크리스쳔으로 말이죠.
지난 30년간 일평생을 한남자의 악세사리로써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꽤나 흡족해했을겁니다. 당신은 남들에게 비춰지는 당신의 모습을 유지시키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퍼부었지만 당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어느 정의도 내릴 수 없을겁니다. 당신의 존재에 대해 한번도 생각을 해본적이 없을테죠. 안 그렇다면 제가 이런 구구절절한 글을 쓸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오랜 세월동안 당신은 내 행동과 내 결정을 통해 제정적인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그런 생존의 외줄 타기, 그리고 그 뒷배경에 촉박하게 돌아가는 시계 시침소리를 듣지 못한채 살아 왔을 것입니다.
배우자가 어련히 다 해결해주는 그런 편한 생활 속에서 홀로 일어서기 위해 고생을 하는 다른 이들을 보면서 속으로 우쭐해했을꺼고 읍소까지 날렸겠지요. 한심하게 고생하는 그들의 작태가 얼마나 어리석어 보였겠습니까? 정작 본인의 이름 석자가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타인에게 인간으로써 내가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는 까맣게 잊어버린채 말이죠.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어떤 정서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을 하기보다는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지 겉치레에만 평생의 힘을 다 쏟아 부었지요?
남들이 어떻게 당신을 생각할까, 혹여 깔보지는 않을까 평생을 전전긍긍하며 살다가 당신의 삶이 꽤나 윤택해졌던 시기엔 당신의 환경을 타인들에게 과시하며 그들이 당신에 대해 가진 생각을 바꾸려고 꽤나 노력했구요. 타인들이 당신의 경제적 여유로움 (지금의 과거의 일입니다만은) 을 보면서 갈채를 날리면서 어릴적 부터 채워지지 않았던 당신 마음속 결핍이라는 우물을 채웠구요.
당신에게 기생하면서 등쳐먹을 기회만 노리는 이가 단연 내 엄마 뿐이었습니까? 당신이 호주란 땅에서 친분을 유지하던 이들과 다 등을 돌린 계기가 그들이 당신을 이용하고 등쳐먹었기 때문이 아니었나요? 당신 주위에 이와 같이 기회주의적이고 배신을 일삼는 이들이 많은것은 원죄도 아니고 업보도 아닙니다. 당신이 자처 한거죠. 친구를 사귈줄 모르니까요.
진실된 마음으로 사람과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친분을 쌓는 능력 자체가 없고 개발할 의지도 없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만나서 당신의 모습을 과시하고 싶으니까 노력은 했겠지요. 상대방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타인의 호감을 사겠다고 물질적인 호의를 미끼처럼 던지고 냉큼 받아먹는 사람들은 당신의 울타리 안으로 들였지 않았습니까?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친분을 쌓을때는 사람을 가지고 낚시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염치도 없고 무근본인 사람들만 들러 붙는겁니다. 허나 이런 관계에서 당신이 얻는것도 있었죠. 소위 당신의 미끼를 받아먹기 위해 연달아 고개를 굽신거리는 ‘그 불쌍한 중생들’ 앞에서 구원자 놀이를 맘껏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일부러 빚에 허덕여 하루살이 인생인 사람들, 불법체류를 하는 사람들, 나이들어 아무도 찾지 않는 괴팍한 심성의 노인들, 세상에 경계심만 가득하고 세상에 대한 불만과 복수심만 가득찬 사람들만 당신의 울타리로 들였지요. 마치 그들을 거두어 갱생시키는 양치기 목자 노릇을 하려고요. 당신이 마냥 일방적으로 당했다고만은 보일수 없지요. 그들을 통해 당신은 우월감을 매번 확인하고 챙겼고 타인을 상대로 구원자 놀이를 하려면 정당한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거니까요.
당신이 애초에 당신의 친구들에게 진심담긴 마음주었는데도 그들이 이해를 못했더라면 당신은 그들의 냉정함을 비난했을테지만 당신은 항상 ‘그들에게 베푼만큼 감사와 찬사를 받지 못했다.’며 울분하며 타인을 힐난했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당신을 구원자로 찬양하지 안했음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잖아요. 좀 더 가지고 있는 상황도 아닐테지만 항상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때 우위의 위치를 선점해서 상대방을 내려다 보려는 태도로는 평생 진정한 친구나 인연을 만들지 못합니다. 당신은 평생 당신의 물질적 호의를 받아 먹고 찰나의 감사멘트만 돌려주는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살아도 산거 같지가 않을겁니다. 남의 찬사가 없으면 끝도 없는 공허함에 빠져 들꺼고 그것이 주는 공포는 삶자체를 생지옥으로 만들죠. 그게 당신이 걸린 저주입니다. 아마도 죽을때까지 빠져 나오지 못할겁니다.
당신은 저에게 베푼것이 아닙니다. 주는척하면서 위에 올라서 내려다 보고 싶어했던 그 저의가 제 눈에는 항상 보였습니다. 저도 당신의 숱한 친구들 처럼 당신의 손길로 인생의 구원을 얻은거 마냥 호들갑을 떨며 달콤한 말로 찬양을 해주길 바랬나요? 그러기엔 저는 그들과 너무 다른 사람입니다. 항상 자기 혐오에 가득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환경만 바꾸고 주변 사람만 바꾸면 모든게 달라질꺼란 환상에 사로 잡힌 우리 엄마는 당신에게서 일말의 구원을 얻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저에겐 제가 사는곳이 호주였던 한국이였던간에 삶의 굴레에서 그리 쉽게 자유로와지진 않았을테고 결이 같은 고통을 겪었을것은 당연했기 때문에 그다지 당신의 초대로 호주에 온것이 일생일대의 구원이라고 보기 힘드네요. 저는 항상 사람 때문에 힘들었고 사람 때문에 행복했던 사람이니까요. 저에겐 환경이나 주어진 부와 능력은 그리 중요치 않았습니다.
제 지옥같았던 청소년기와 청년기는 어찌보면 엄마의 망상과 당신의 허영이 만들어낸 합작품인거죠. 왜 30년을 엄마와 인연을 못 끊었나요? 왜 못 끊었을까요? 피가 땡겨서라는건 말도 안 되는 변명일 뿐이고요. 험난하게 살면서 지지리도 궁상을 떠는 내 엄마를 보면서 당신은 좀 더 나은 인간이라는것, 그 우월감을 상기시키지 않으면 당신이 불행했었을테니까요. 그러면서 물질적으로 도와주는척 거들어 주면서 내 부모가 한심하다는듯 한숨을 팍팍 쉬면서 무시인지 동정인지 모를 그런 말들을 내뱉고 남들 앞에선 8살 연장자인 당신 언니네 가족을 불행의 소굴에서 꺼낸 은인임을 매번 강조해야 했으니까요. 당신 구원자 놀이의 적절한 소품이었죠.
독실한 크리스쳔으로 거듭남을 믿어 의심치 않던 당신에겐 당신이 살면서 베푼 자비로 인해 다시 살 수 있게된 중생들이 필요하니까요. 그들을 밟아 딛고 일어서야 당신의 품격이 상승하는 느낌이 드니까요. 가족의 불행에 적극적으로 헌신하는척 하면서 훈계질 하면서도 당신은 헌신하는 성인의 이미지에 가까워 진다고 믿는거죠. 이런 환영에 빠져 취해서 사는것 만큼 더 강력한 마약이 있을까요?
아마도 당신은 지금 극심한 현실 부정과 자아 부정에 빠져 내가 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인정하기 두려워 하겠죠. 평생 당신 앞에서는 입을 다물고 당신의 얘기들을 원없이 들었기에 저는 당신에 대한 깊은 파악이 가능했지만 여전히 당신은 제 속내를 알지 못합니다.
왜 당신의 삶이 당신 기대에 못 미친다고 해서 타인인 내가 행동을 취하고 내가 바뀌어야 합니까? 이 물음은 내 엄마에게도 묻고 싶기도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말을 섞는거 조차도 무의미 해져 버렸습니다.
당신이 당신 삶에 조금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문제입니다. 삶에 대한 만족도는 생각의 전환으로 다 가능합니다. 내가 달라져야 하는것이죠. 남에게 달라지길 기다리는거 보다요.
첫번째로 당신이 결정권을 진것에 대해 최대한 삶에 도움이 될 방향을 모색해 적절한 선택을 하는것. 이 행동 양식에 충실하셨는지요? 갓 성인이 된 이후로 제 엄마가 당신에게 기생을 하면서 당신을 항상 못 살게 굴었다고 하셨나요? 이미 35년전에 무려 당신은 당신의 언니가 반이성적으로 8살이나 어린 막내 여동생을 상대로 사랑을 베풀기는 커녕 금전적을 뜯어 먹었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왜 그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던겁니까? 당신을 상대로 제 엄마가 벗겨먹은 결과로 오늘날에 내가 태어났다며 나의 탄생과 존재 조차 당신의 공으로 돌리려는 그런 괴랄한 논리는 단지 하나님을 믿으니 생겨난 전지전능함입니까 아니면 터질듯 부풀어 오른 당신의 에고(ego) 입니까? 타인에게 당할때마다 그렇게 정신승리하라고 당신의 하나님이 일러준 지혜의 은사라고 이런걸 칭하는건가요?
만약 당신이 한시라도 당신의 언니가 관계를 유지하면 유지를 할 수록 당신을 곤경에 빠트린다는걸 빠르게 눈치채고 당신의 주위를 맴돌지 않게끔 적절한 조취를 취했더라면 지금 더러운 꼴을 당하는 일도 없었겠죠. 다른 나라까지 이주를 해서 평생 안 보고 살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이 떵떵거리면서 사는걸 보여주기 위해 내 엄마에게 호주로의 이주를 권한건 당신입니다. 그렇게 불러들여서 당신 주위를 30년을 맴돌고 당신의 괄시를 받으면서 당신에 대한 분노심과 질투를 키워가게 만든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겠죠.
이미 말씀 드렸지만 내엄마가 혈육이고 아님을 떠나서 당신에게 어떤 존재이며 어떤 가치를 가지고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명명백백히 따지고 관계의 제정립만 제대로 했더라면, 모든것이 당신의 기대에 부합하는데로 흘러갔을지도 모르죠. 남들을 상대로 당신의 과시욕은 채우지 못했을 지언정, 적어도 사람들한테 당하고 살진 않았을테니까요. 당신이 주체적으로 당신 주위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제정립하지 못한 그 무지, 그저 세상이 알려주는대로 혈육은 나에게 상극이며 절대인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저 다 받아주라는걸 아무런 의심 없이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 죄로 당신의 현재가 이렇게 고통스러운것입니다.
두번째로 타인에 의해, 이 시대의 한계로 인해 당신의 삶이 당신의 기대치에 부합을 하지 못한다면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고 당신의 기대치를 재설정해야 하는겁니다. 새로운 도전을 용기도 없고 노력을 할 의욕도 없으면 이룰수 있는것에 대한 선택권이 줄어드니까 당연히 기대치를 줄여야하고 허영과 과시욕에서 한발짝 물러나야죠. 그렇지만 당신은 어땠습니까? 일생을 전업주부로 살면서 남편의 수입으로만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매일 아침 백화점에 출근 도장을 찍는 여느 사모님의 삶을 그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꿈꿔 오지 않았습니까?
남들 앞에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면 남편의 수입이 늘던지 당신이 그 수입원을 찾아 노동을 하던지 그 둘중의 하나를 취해야 겠죠. 남편의 수입은 당신이 말로 쪼아 댄다고 해서 무작정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건 그의 재량에 달려있는겁니다. 어차피 당신에겐 그 영역에 대한 어떠한 영향도 행사하지 못합니다. 그냥 운에 맞기거나 능력있는 남자를 만났길 기도하는 수 밖에요. 그렇다고 해서 당신 스스로 수입을 창출해냈는지요? 오히려 워킹맘들을 속으로 깔보고 동정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처럼 잘난 얼굴과 몸매를 가지지 못했기에 저리 고생을 하는거라면서 말이죠.
당신이 했던 가사노동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말을 하려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가정형편에 맞지 않는 허영과 과시욕은 한도 끝도 없기에 굴지의 대기업 사모님이 아닌이상 어차피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정 그걸 누리고 싶다면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거죠. 그냥 마냥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염원한다고 그런 때가 옵니까? 그렇게 당신 남편에게만 당신의 삶을 송두리째 일임하는 그런 수동적인 악세사리의 삶을 너무나 자랑스러워 하면서 당신의 허영심을 못 채워주는 남편이 그리도 밉습니까? 당신이 세상을 상대로 부딛히면서 싸워야 할 상황은 당신 남편이 죄다 막아주지 않았습니까? 지난 30년을 고정적인 수입을 한번도 벌어본적이 없는 당신이 ‘돈은 써야지 더 따라온다더라’ 라는 말을 지껄일때는 속으로 헛웃음만 나더군요. 그런 워딩은 소위 사업수완이 좋은 이들이 사업 번영을 위해 선투자를 할때 쓰는 말입니다.
남을 마냥 따라잡는것을 삶의 이상으로 잡는것 자체만으로도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짓인데 당신은 거기에 남보다 더 우월해 보이는것을 삶의 이상으로 잡고 그걸 현실적인 목표라고 그렇게 자기 최면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왔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현실부정이 당신만 망쳤나요. 보다 더 끔찍한것은 당신의 알량한 그 자존심때문에 당신 자식의 삶까지 볼모로 잡고 망쳐놓지 않았습니까. 뒤돌아 볼줄 모르는 그 망각때문에 고통 받는건 비단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어릴시절 귀엽고 앙증 맞기만 하던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의 보살핌 아래에도 불구하고 나날히 심해지는 학습장애와 야뇨증을 수년간 앓아와도 남들이 알면 큰일 날까, 내 자식은 온전해야 한다라는 자기 최면을 매일 걸어가며 치료시기를 놓치고 그렇게 자녀들이 정작 필요했던 것을 부정하고 방치한 세월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을 늘어 놓을껀가요.
당신들의 자녀들을 남들 앞에선 누구보다고 뛰어나고 온전해야 하기에 천금만금을 주고 사립학교를 보낼지언정 아이가 학급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정도로 주의력 결핍으로 선생님과 다른 학부모들에게 미운털이 박히던 그 시절에도 한번이라도 전문가를 찾아가서 원인을 파악하고 개선하려는 시도를 한적이 있습니까? 그저 아이의 영리함을 알지 못하는거라며 전학만 여러번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아이의 부족함을 채워줄 생각은 하지 않았죠. 내 아이는 부족함이 있는, 그런 결함이 있는 아이가 아니니까요. 당신의 아들이 이후 방황과 방황을 거듭하고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을 하며 자신이 좋아하는것, 자신이 잘하는것 하나 모른체 살아왔는지 갈피도 잡히지 않겠죠? 남에 눈에 띄일까봐, 아들에게 병력이라는 흔적이 남을까봐 그렇게 죄없는 당신 자식을 나락으로 몰아간것은 당신입니다. 내가 만약 당신의 아들로 태어나, 내가 가진 만큼의 시야를 가졌다면 난 절대로 부모인 당신들의 방관, 모순 그리고 선택적인 애정에 치가 떨려 가만히 있질 못할것입니다. 유아적인 마인드를 소유한 부모로 인해 피를 본자가 단연 저뿐이겠습니까? 이미 문자로 한번 퍼부었을때 말씀드렸잖습니까? 당신의 외할머니, 당신의 엄마, 나의 엄마, 당신 죄다 결이 같은 사람들이라고요. 등잔밑이 어둡습니다. 당신 내외가 당신 아들에 저지른 패악은 나몰라라 하고 있군요.
같은 연유로 2차 성징이 한참 지난뒤까지도 야뇨증을 겪던 당신 딸. 당신의 허영탓 때문인지 거금을 주고 바로 옆동네에 있는 사립학교 기숙사에 보내면서도 남들에게 야뇨증이 들킬세라 매일같이 학생들이 저녁먹으러 식당으로 달려가면 텅빈 기숙사 방에 기저귀를 수거하러 매일 같이 찾아 가셨죠? 제 엄마와 제가 당신과 함께 그 미친짓을 하러 가던날 저는 도무지 입을 다물수가 없더군요. 아이러니하게도 내 엄마 조차도 그건 이해가 안 되고 용납을 할 수 없어 당신 딸을 데리고 전문의를 찾아가 항불안증 약을 처방 받고 그렇게 허무하게 짧은 시간만에 완치를 했죠. 그렇지만 이렇게 1-2주내에 치료가 가능한 이런 심플한 문제도 당신의 그 독한 현실 부정탓에 도대체 몇년간을 당신은 애먼 아이에게 매일밤 기저귀를 입히며 아이에게 씻지 못할 수치감을 안겨주고 본인 또한 해도 되지 않을 뒷처리를 매번 해가며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한것입니까?
사람이 이렇게 비현실적 이상에 빠져 남들에게 마냥 보기 좋은 허우대만 추구하면서 살게 되면 비이성적인 삶에 스스로를 속박해버리는것입니다.
다시 확실히 해두지만 30년동안 내 엄마가 당신 곁에 맴돌게 방치하고 되리어 짬짬히 그녀의 불행 앞에서 멀쩡하게 살아가는 당신의 우월한 삶을 위시하려던 당신의 허영심 때문에 현재의 상황이 초래된것입니다. 끊고 맺음을 분명히 하지 못한것 또한 당신의 욕심 때문이었죠. 그만큼 불행하고 불만 많은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있어야 당신은 그나마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확인 받고 행복해지니까요. 아주 찰나만이지만요.
나와 내 엄마의 관계와, 당신과 내 엄마의 관계는 확연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나는 이미 내주위 사람들과 나사이의 관계를 수백번, 수천번의 고뇌 끝에 재정립하고 더 이상의 나의 일방적인 헌신이 자갈만 가득한 돌산 같은 우리 가족들을 어떻게 바꿀 수 없다는것을 깨달었기에 떠나온겁니다. 나의 노력은 마치 모종삽을 들고 커다란 돌산을 옮기려는 그런 무모한 행위인것을 알아버려서 그걸로 내 삶자체를 통채로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떠난겁니다. 어느 누구도 화목한 가정을 위해 누구 하나 변화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고 바뀌지 않을것을 알았기에 나 또한 그런 무의미한 헛된짓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 할 수 없었죠. 누군들 내 입장이라면 똑같은 답에 도달했을것입니다. 그렇기에 당신도 내 엄마도 나에겐 그저 시간만 낭비하는 그런 무의미한 존재일뿐인겁니다.
만약 당신이 훨씬 이전에 내가 깨달은것을 깨달았더라면, 당신 두자매 사이가 50년넘는 세월동안 이렇게 틀어지게 된것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나를 두고 엄마가 그렇게 된것에는 내 원인이 크다며 그런 책임전가의 궤변을 늘어 놓는 일 또한 없었겠지요. 내 엄마는 나를 낳기 훨씬 이전에도 그래왔던 사람이란건 당신이 더 잘 알고 더 잘 알아야 하지 않나요? 살 맞대고 같이 살던 당신의 언니 아닙니까?
만약 당신에게 그런 혜안이 있었더라면 애먼 나같은 사람에게 2년이란 세월을 마냥 목 매달면서 ‘너의 엄마를 정신병원에 집어 넣어라’, 왜 너의 의무를 등지고 도망치려 하느냐 라면서 나를 타박하는 일도 없겠죠. 누가 당신에게 호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당신 마당에 오물을 치워주는 해결사 역할을 하면서 그렇게 타박과 구박을 받으면서 하려고 하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그런 싸구려 농간에 당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언니가 하는 폭언이 견디기 힘들면 정당한 방법으로 경찰에 신고를 하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건 눈에 안 보이던가요? 언니를 제손으로 신고는 차마 못하겠고 자식인 네가 네 손에 피를 묻혀 너의 엄마를 정신병동에 집어 넣어라 이런 패륜을 저지르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노하실 일입니다.
내 부모를 섬기고 존중하는것이 당신이 매일 노래를 부르는 여호와 하나님이 내리신 계명인데 어찌 이렇게 반율법적인 행위를 남에게는 눈깜짝도 안 하고 종용을 하는지요?
당신이 과거와 현재에 하는 과오를 돌아 보지 않았기에 미래에 하나님이 내리는 커다란 십자가가 되어 당신 어깨위에 내려지는것입니다. 당신에게 그렇게 은혜와 은총을 내려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손수 당신에게 얹어주신 십자가입니다. 그의 계명에 반항하지 말고 의문을 가지지 마십시오. 이겨내고 견뎌내는것이 당신같은 모범적인 크리스쳔들이 가야하는 길이고 이것은 나같은 우매한 중생들에게 훗날 좋은 선례로 남을 것입니다.
의심 하지 마십시오.
대들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이보다 더 크나컸음을 잊지 맙시다.
당신의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고통입니다.
남의 손을 빌려서 벗어나려고 하는것은 편법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혀 온당치 못한 행위입니다.
과거에서 온 십자가들이 한개, 두개 당신의 어깨위에 올려지고 그걸 마저 다 끌고 가다보면 하나님 세상 문턱에 다다를 수 있을겁니다. 고통에 이면에는 항상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것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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